◆ 한국전쟁의 원인과 전개과정 그리고 성격 ◆
남북한 분단체제와 동북아 냉전체제를 고착시켰던 한국전쟁은 그 이전 시기 국내외 갈등의 최종적 귀결이었고 그 이후 남북한 분단사회의 출발이었다. 한국전쟁의 원인과 구조적 배경은 국내적으로는 한국전쟁의 기원은 일제 때부터 비롯되고 해방정국에서 현재화된 혁명과 반혁명의 갈등, 즉 반제반봉건혁명을 둘러싼 내부 갈등이며, 국제적으로는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계기로 대립하게 된 미소의 대립과 그 속에서 전개된 동아시아 사회주의적 민족해방투쟁세력과 미국 또는 미국이 지원하는 세력 사이의 대립에서 찾을 수 있다. 곧 세계적인 차원에서 미소의 대립 등이 다차원적인 한국전쟁의 기원인 것이다.
1947년 이후 국내외적으로 적대적인 양극구조는 점차 분명한 모습을 갖추어 갔다. 이러한 양극 구조적 대립의 심화는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의 구조적 배경이 된다. 1950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미국의 정책이 이제까지의 봉쇄정책에서 롤백정책으로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롤백정책은 38선 이북으로까지 미국의 행동반경이 확대될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한국전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결국 1950년에 들어 남한정권의 내부 위기, 북한 군사력의 강화, 대만문제와 관련된 일련의 미묘한 주변정세 등이 겹쳐지면서 상황은 한국전쟁으로 치달았다.
1949년은 미소 양군이 철수하면서 남북한 정권이 자신의 일정한 독자적 재량 하에 적대적인 대립과 충돌을 고조시켰다. 이 시기 5월에서 8월까지의 38선 분쟁, 7월에서 10월까지의 남한 무장유격대의 공세 등 내전이 전개되었지만, 미 군사고문단은 남한내 무장유격투쟁에 대한진압에서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38선 분쟁에 대해서는 방관하거나 오히려 통제하였다. 이러한 것은 이승만의 호전적인 태도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로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남한 이승만 정권의 반공
통제의 강화는 제주, 여순 등 남한내의 무장투쟁에 대한 성공적인 진압의 결과였다. 이러한 남한내의 무장투쟁은 이승만 정권에게 항쟁의 진압을 통하여 기반이 취약한 자신의 체제를 강화시킬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또한 12월에는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어 사회통제의 법률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이승만은 1949년 하반기에 집중적으로 북진통일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러한 시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내 반공 강경론자들은 자극하는 동시에 미국의 대한 공약과 지원을 분명하게 확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승만은 미국에 대해 북진통일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촉구하였다.
남북한은 1949년 동안 전면적인 전쟁은 아니지만 무력적인 압력을 통하여 상대방에 위협을 가함으로써 군사적인 긴장을 고조시켰다. 그러나 남북한의 무력대립과 충돌은 1949년에는 전면적으로 확산될 조건을 구비하지는 못하였다.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남한정권에 대한 분명한 보장이 이승만의 도박을 유발시킬지 않을지 우려했던 미국의 지원이나 개인을 확보하게 보장받지 못했고, 북한 역시 전면적인 군사 대응을 할 정도로 충분한 군사적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1949년의 경험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상대방을 무력으로 공격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상대방에게 각인시켜 주기에는 충분했다.
한국전쟁의 원인과 미국의 정책변화와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수정주의 학자들은 미국의 팽창정책이 강화되는 가운데 미국의 대한정책이 공산측의 남침을 유도한 것이라는 의문을 던지기도 하였다. 미국의 정책적 성격에 대한 주장은 첫째, 미국의 대한공약이 약화되었고 따라서 이를 오판한 공산측의 침략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주장이다. 미국내의 매카시즘적 반공 강경론자들이 제기했고 대체적으로 한국전쟁에 대해 전통주의적 시각을 지닌 학자들에 의해 지지되었다. 둘째는, 미국의 대한공약이 약화되었건 강화되었건 그것이 직접적으로 한국전쟁의 발발과 관련이 없다는 다양한 중간적 입장들이다. 셋째는, 미국의 대한공약이 약화된 것이 아니라 강화되었지만 이것이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나타남으로써 북한의 침략이 '유도'되었을 가능을 시사하는 주장으로 구분된다.
Ⅱ.
남한 분단체제에 대한 좌익의 도전은 1949~1950년 겨울 무장유격대에 대한 동계토벌로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결국 1950년에 들어 남한에서의 좌익활동은 거의 근절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위기는 반공 강경노선의 추구는 국방비와 치안유지비의 과다 지출을 가져왔고, 이는 재정적자를 가져왔으며, 이를 메우기 위한 통화량 증발은 1949년 후반에서 1950년 초에 이르는 동안 급속한 인플레를 가져왔다. 곧 이승만 정권의 반공 강경정책은 1949년 후반 이후 경제위기로 나타났다. 동시에 이승만 정권에게 정치위기도 도래했다. 요컨대 경제적 정치적 위기로 인하여 이승만 정권은 위기 타파의 돌파구를 찾아내야 하는 상황에 몰리고 있었다.
북한의 상황은 1949년 후반기에 군사력을 집중적으로 증가시켰으며, 1950년에 들어서도 지속적으로 병력을 증가했다. 이러한 북한 군사력의 증가는 한인 동북의용군의 대거 귀환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북한은 한국전쟁 직전 두 번에 걸쳐 서로 다른 내용의 통일 제의를 한 바 있다. 6월 7일 조국전선에 의해 발표된 평화통일 호소문은 남북의 전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가 대표자협의회를 구성하고, 총선거를 통하여 통일된 최고 입법기관을 창설하자고 제의했으나, 6월 19일 최고인민회의에 의해 제안된 내용은 북한의 최고인민회의와 남한의 국회를 연합하여 헌법을 채택, 이에 따라 전조선입법기관을 구성하자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직전의 이 두 통일 제의는 10여 일 사이에 그 내용이 바뀌었다는 점, 두 제의 공히 8월 15일까지 통일 일정을 마무리하고자 했다는 점, 전자의 제안에서는 이승만을 비롯한 민족 반역자 9인을 대표자협의회에서 제외하자고 하는 한편 후자의 제안에서는 이들을 체포하는 조건을 제시하는 등 이들 9인에 대한 배제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전쟁 직전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상황을 살펴보면, 남한 외부에서는 자유 진영의 롤백주의자들이 전쟁의 발발을 고대하고 있고 소련은 북한의 무력 강화를 도와주는 가운데, 남한 정권은 내부 위기의 돌파구를 찾고 있었고 북한은 고도의 긴장 속에서 무력 강화와 전투계획 작성에 치중하고 있었던 상황, 이것이 한국전쟁 직전의 전체적 상황이었다.
Ⅲ.
전쟁 발발과 관련된 주장들은 전면적 북침설, 전면적 남침설, 제한적 북침설, 제한적 남침설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전면적 북침설은 북한의 공식주장이고, 전면적 남침설은 남한 정부의 공식적 입장이다. 제한적 북침설은 남측이 전쟁을 유도하기 위해 제한적으로 북을 공격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여기서는 옹진반도 17연대의 해주 공격가능성이 유력시하고 있다. 이 공격은, 중국에서 귀환한 병사들로 군사력을 강화한 채 남한측의 최초 공격을 기다리고 있던 북한의 공격을 야기시켰을 것이라는 것이다. 제한적 남침설의 핵심적 내용은 북한이 군사적으로는 서울 점령만을 목표로 공격했고, 정치적으로는 남한의 2대 국회와 연합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군사적 전개과정은 군사적 상황의 추이에 따라 4국면으로 나눌 수 있다. 1국면은 1950년 6월 25일부터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던 9월 중순까지로, 인민군의 공세 속에서 미군의 개입이 이루어졌던 시기이다. 2국면은 9월 중순 이후로부터 북진한 유엔군이 다시 후퇴하기 시작한 11월말까지의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에는 유엔군의 38선 북진과 중공군의 개입이 이루어졌다. 3국면은 11월말 이후로부터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교착되고 휴전협상이 시작되는 1951년 6월까지의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에는 유엔군의 후퇴가 이루어졌고 이어 전쟁이 제한되면서 38선 부근에서 전선이 교착되었다. 4국면은 6월 하순 이후로부터 한국전쟁이 끝나는 시점인 1953년 7월까지의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에는 휴전협상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면서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여기서는 제 2국면인 유엔군의 북진과 중국군의 개입 그리고 제 4국면인 휴전협상을 둘러싼 갈등과 소모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는 크로마이트작전으로 명명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였고, 동시에 낙동강 방어선의 유엔군도 총반격을 감행하여 28일에는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하였다. 10월 1일에는 국군이, 7일에는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했다. 38선의 북진의 의미는 이제까지의 전쟁이 전전의 원상회복을 위한 '봉쇄를 위한 전쟁'이었다면, 38선 북진은 북한으로의 확전을 의미하는 '롤백을 위한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북진을 둘러싸고 벌어진 미 정책결정자 사이의 논쟁은, 38선을 돌파하고 북한을 점령한 후 유엔 주도하에 한국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주장과, 중소의 개입이 없을 때에만 유엔의 결정으로 북진하되 이들의 개입 여부가 확인될 때까지 결정을 유보하자는 주장 사이의 대립이었다. 전자는 국무성 동북아과 및 군부를 중심으로 주장되었고, 후자는 국무성내 정책기획국이 중심이 되었다. 결국 이러한 논쟁은 전자의 주장이 강하게 반영된 '조건부 북진론'으로 귀결되었다. 구체적으로 이같은 결정은 북한지역에서 중소의 개입을 우려하여 마련된 미군의 작전제한선을 전제로 한 북진 전력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이러한 결정은 유엔의 결정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10월 7일 유엔 총회는 '통일한국안'을 승인함으로써 유엔군의 북진을 사후 합리화시켰다.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의 개입은 10월 2일 소련이 중국군에 대한 공중지원과 전쟁물자를 지원한다는 조건으로 승인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에서 미국과의 직접 대립을 회피하고자 했던 스탈린은 중국군의 참전 직전 갑자기 소련 공군의 파견을 연기시켰다. 결국 중국은 소련의 공군 지원 없이 참전하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중국에 대한 소련의 지원은 1951년에 이르러서야 본격화되었다.
중국은 '抗美援朝保家衛國'의 기치 아래 한국전쟁에 개입하였다. 개입의 가장 커다란 이유는 미국의 공격을 '脣亡齒寒'의 관계에 있는 북한에서 사전에 막아내기 위해서였다. 또한 그것은 중국의 국공내전 과정에서 공산측에 참여하여 싸운 한인들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여하튼 미국의 개입으로 이미 국제전화되었던 한국전쟁은 중국의 개입으로 미국과 중국의 직접적인 전투장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휴전협상에 임하는 유엔측은 군사문제만을 취급하고자 했고 반면 공산측은 외군철수 등의 정치문제까지도 포함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정치 문제는 관련 각국에 대한 건의 문제로 처리되어 전후로 넘겨지게 되었다. 의제는, 1.의제 및 의사일정 채택, 2.군사분계선 설정, 3.휴전감시 방법 및 기구 구성, 4.전쟁포로 처리, 5.관련 각국 정부에 대한 건의 등 5개 항목으로 합의되었다.
휴전협상에 임하는 미국측의 기본입장은 군사적 완전 승리가 불가능한 이제 '영예로운 해결'을 통하여 정치적 심리적 승리는 거두는 것이었다. 남한 이승만 정부는 휴전협상에 시종일관 반대하였고, 휴전이 불가피하게 되었을 때조차 미국으로부터 가능한 한 최대의 지원을 끌어내고자 하였다. 반면 공산측은 '정당한' 조건에서 휴전협상을 이루고자 했고, 따라서 자신에게 강요되는 부당한 조건에 대해서는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므로 전쟁을 끝내고자 시작되었던 휴전교섭은 전쟁을 2년여나 더 지연시켰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 협상과 군사적 압력이 교대로 이어지면서 전쟁의 피해를 증대시켰다.
1951년에는 주로 군사분계선 문제가 논의되었다. 유엔측의 주장은 지상접촉선보다 훨씬 북쪽의 선을 제시했고, 공산측은 38도선을 제시했다. 양측의 교섭은 8월 22일에서 10월 25일 까지 한차례의 중단을 거친 후에 다시 재개되어 지상 접촉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1952년에는 휴전감시 문제와 포로 처리 문제가 주로 논의되었다. 휴전감시 문제는 1952년 5월 2일 휴전감시 출입지역을 쌍방 5개소로 하고, 휴전감시 기구로 체코, 스위스, 스웨덴, 폴란드 등 4개국의 중립국감독위원회를 구성할 것에 합의하였다. 포로문제는 유엔특이 본인의 의사를 확인하여 원하는 포로만 송환하자는 '자유송환원칙(자원송환원칙)' 을 내걸고, 공산측이 제네바협약에 의한 '자동송환원칙(강제송환원칙)'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해결이 지체되고 있다. 유엔측의 주장대로라면 원래 유엔측이 제시한 13만 명의 공산측 포로 중 8만명 만이 송환될 수 있었다. 공산측은 이에 격렬히 반대하였고,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포로 심사와 그 과정에서의 고문, 살해 등에 저항하여 공산 포로들이 수 차례에 걸쳐 폭동을 일으켰다. 결국 포로 처리 문제의 이견으로 인하여 휴전협상은 1952년 10월 8일 다시 중단되었다.
휴전의 분위기는 1953에 들어서 분명해졌고, 이러한 가운데 양측은 포로 문제에 합의하였다. 우선 4월에 병상포로가 교환되었다. 4월 26일에는 중단되었던 휴전회담이 재개되었다. 결국 양측은 귀국희망 포로는 송환하고 귀국반대 포로는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인계하여 그 의사를 확인토록 하고, 여기에서 결정되지 않은 포로들은 민간인으로 석방하도록 합의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휴전에 반대하는 이승만이 6월 반공포로들을 일방적으로 석방했다. 이승만을 제거하고자 하는 '常備'계획까지 세웠던 미국은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이승만에게 휴전협정의 대가로 한미상호방위조약 등 대한공약의 강화를 약속함으로써 그를 달랬다.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3년여에 걸친 한국전쟁은 종료되었다.
Ⅳ.
한국전쟁을 계기로 북한은 본격적으로 독자적인 사회주의체제를 형성해 나갔다. 경제적으로는 생산수단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본격화하여 사회주의혁명을 완성시켰고, 전후복구의 과정에서 자립적 공업화 전략을 추구하였다. 정치적으로는 한국전쟁과 전후복구 과정에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지도체제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자주를 핵심내용으로 하는 주체사상이 형성되었다. 한국전쟁의 영향은 전후 북한의 사회주의체제가 독특한 성격을 지니도록 만들었다. 전후 북한 사회주의에 미친 가장 커다란 특징적 영향은, 전쟁으로 파괴된 생산력을 전쟁으로 고양된 의식을 통하여 일거에 증대시켜 산업화하려 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은 경제적으로 남한이 세계자본주의체제 속에 편입되어 종속적 경제발전을 추구하고,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강력한 반공독재체제를 구축하도록 만들었다. 남한이 정치경제적으로 세계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되어 자신의 자본주의체제를 재생산하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이 관련국들에 미친 영향은, 첫째, 한국전쟁은 미국에 반공반소의 극단적인 매카시즘적 분위기를 야기시켰다. 둘째, 한국전쟁은 병참기지 역할을 한 일본의 경제를 부흥시켰으며 일본의 재무장을 촉진시켜, 나중에 자위대로 발전하게 되는 경찰예비대가 창설되었다. 셋째, 소련은 한국전쟁에 대한 어중간한 태도로 인하여 양진영에서 욕을 먹었고, 북한의 친중국화하도록 만들었다. 넷째, 중국은 한국전쟁에 참여하여 제 3세계에서 위신을 높이는 한편 내부적으로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의 지도력을 높였다. 반면에 대만 통일의 기회를 잃어버리는 한편, 이후 20년 동안이나 미국과 대립함으로써 대만은 한국전쟁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한국전쟁이 남북한 분단구조에 미친 영향은 휴전협정 체결 이후 정치협상을 통한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실패한 데서 상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전후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무산되고 남북은 단지 전투행위만 중단시키고 있는 휴전상태에서 이후 군사적 대립을 계속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세계적인 냉전구조에 미친 영향은 한국전쟁 이후 팍스아메리카나 체제가 확립되었고, 유럽에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강화되었으며 아시아에서는 태평양 안보체제가 강화되었다. 태평양 안보체제는 미일평화조약 및 대평양안보조약, 앤저스(ANZUS) 및 동남아조약기구(SETO)와 중앙조약기구(CENTO) 등의 지역동맹체제, 한미상호방위협정과 미일안보조약 등을 통하여 구축되었다. 한편 한국전쟁 이후 미국은 급속히 핵무기를 증대시켜 냉전대립에서 '대량보복전략'을 채택하였다.
Ⅴ.
한국전쟁의 성격은 첫째 미소를 중심으로 한 체제대립적 성격을 주장하는 시각, 둘째 내부의 갈등을 주장하는 내전적 시각, 셋째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저항하는 한국 민중의 민족해방투쟁적 시각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의 체제대립적 시각은 한국전쟁의 성격을 미소를 대리한 대리전쟁으로 파악한다. 미소의 대립에서 소련의 팽창정책이 한국전쟁의 원인이라는 전통주의적 시각과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이 한국전쟁의 원인이라는 수정주의적 시각이 포함된다. 두 번째 내전적 시각은 한국 내부의 민족적 계급적 갈등이 한국전쟁의 기본적 동인이라고 파악한다. 이러한 시각은 후기수정주의자들이 포함된다. 세 번째 시각은 일제에 대한 민족해방투쟁에 뒤이어 미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예속화정책에 대한 한국민중의 저항으로 한국전쟁의 성격을 파악한다. 예를 들면 북한의 조국해방전쟁론이 대표적이다.
한국전쟁의 배경은 국내적 차원, 동북아시아 차원 및 세계적 차원의 중층적 대립구조를 다음과 같이 지니고 있었다.
·1950. 6. 25 ~ 6. 30 : 한국전쟁 발발 이후 미 지상군의 본격 개입이 있기까지 한국전 쟁은 '내전적 성격'을 보이고 있다.
·1950. 6. 30 ~ 10. 19 : 미국 개입 이후 중국군이 개입하기 이전까지는 '민족해방적' 성 격을 보여주고 있다.
·1950. 10. 29~ 1953. 7. 27 : 중국이 개입한 이후에는 중국과 미국의 '체제 대립적'성격 을 보여 주고 있다.
이상과 같이 전쟁의 확대와 더불어 형태상으로 전쟁의 성격이 변화하고 있다. '내전적 성격→내전적 성격+민족해방적 성격→내전적 성격+민족해방적 성격+체제대립적 성격' 등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직접적인 무력의 사용에 의해서 현실적 구체화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려는 전쟁을 현실전이라 보고, 동원되는 폭력의 종류와 수준이 다양하면서 가시화된 현실적 목표보다 이념상 명분 확보를 목표를 삼는 전쟁 양상을 이념전이라고 정의한다면, 한국 전쟁은 이 두가지 양상을 동시에 머금고 있는 전쟁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전쟁은, 전통적 의미에서의 현실적인 전쟁 목표도 가지고 있었던 반면, 동·서 이념 분쟁의 최전선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명분상의 목표가 중요시되었던 이념전(理念戰)이었던 것이다.
남북한 분단체제와 동북아 냉전체제를 고착시켰던 한국전쟁은 그 이전 시기 국내외 갈등의 최종적 귀결이었고 그 이후 남북한 분단사회의 출발이었다. 한국전쟁의 원인과 구조적 배경은 국내적으로는 한국전쟁의 기원은 일제 때부터 비롯되고 해방정국에서 현재화된 혁명과 반혁명의 갈등, 즉 반제반봉건혁명을 둘러싼 내부 갈등이며, 국제적으로는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계기로 대립하게 된 미소의 대립과 그 속에서 전개된 동아시아 사회주의적 민족해방투쟁세력과 미국 또는 미국이 지원하는 세력 사이의 대립에서 찾을 수 있다. 곧 세계적인 차원에서 미소의 대립 등이 다차원적인 한국전쟁의 기원인 것이다.
1947년 이후 국내외적으로 적대적인 양극구조는 점차 분명한 모습을 갖추어 갔다. 이러한 양극 구조적 대립의 심화는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의 구조적 배경이 된다. 1950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미국의 정책이 이제까지의 봉쇄정책에서 롤백정책으로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롤백정책은 38선 이북으로까지 미국의 행동반경이 확대될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한국전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결국 1950년에 들어 남한정권의 내부 위기, 북한 군사력의 강화, 대만문제와 관련된 일련의 미묘한 주변정세 등이 겹쳐지면서 상황은 한국전쟁으로 치달았다.
1949년은 미소 양군이 철수하면서 남북한 정권이 자신의 일정한 독자적 재량 하에 적대적인 대립과 충돌을 고조시켰다. 이 시기 5월에서 8월까지의 38선 분쟁, 7월에서 10월까지의 남한 무장유격대의 공세 등 내전이 전개되었지만, 미 군사고문단은 남한내 무장유격투쟁에 대한진압에서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38선 분쟁에 대해서는 방관하거나 오히려 통제하였다. 이러한 것은 이승만의 호전적인 태도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로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남한 이승만 정권의 반공
통제의 강화는 제주, 여순 등 남한내의 무장투쟁에 대한 성공적인 진압의 결과였다. 이러한 남한내의 무장투쟁은 이승만 정권에게 항쟁의 진압을 통하여 기반이 취약한 자신의 체제를 강화시킬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또한 12월에는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어 사회통제의 법률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이승만은 1949년 하반기에 집중적으로 북진통일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러한 시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내 반공 강경론자들은 자극하는 동시에 미국의 대한 공약과 지원을 분명하게 확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승만은 미국에 대해 북진통일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촉구하였다.
남북한은 1949년 동안 전면적인 전쟁은 아니지만 무력적인 압력을 통하여 상대방에 위협을 가함으로써 군사적인 긴장을 고조시켰다. 그러나 남북한의 무력대립과 충돌은 1949년에는 전면적으로 확산될 조건을 구비하지는 못하였다.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남한정권에 대한 분명한 보장이 이승만의 도박을 유발시킬지 않을지 우려했던 미국의 지원이나 개인을 확보하게 보장받지 못했고, 북한 역시 전면적인 군사 대응을 할 정도로 충분한 군사적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1949년의 경험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상대방을 무력으로 공격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상대방에게 각인시켜 주기에는 충분했다.
한국전쟁의 원인과 미국의 정책변화와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수정주의 학자들은 미국의 팽창정책이 강화되는 가운데 미국의 대한정책이 공산측의 남침을 유도한 것이라는 의문을 던지기도 하였다. 미국의 정책적 성격에 대한 주장은 첫째, 미국의 대한공약이 약화되었고 따라서 이를 오판한 공산측의 침략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주장이다. 미국내의 매카시즘적 반공 강경론자들이 제기했고 대체적으로 한국전쟁에 대해 전통주의적 시각을 지닌 학자들에 의해 지지되었다. 둘째는, 미국의 대한공약이 약화되었건 강화되었건 그것이 직접적으로 한국전쟁의 발발과 관련이 없다는 다양한 중간적 입장들이다. 셋째는, 미국의 대한공약이 약화된 것이 아니라 강화되었지만 이것이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나타남으로써 북한의 침략이 '유도'되었을 가능을 시사하는 주장으로 구분된다.
Ⅱ.
남한 분단체제에 대한 좌익의 도전은 1949~1950년 겨울 무장유격대에 대한 동계토벌로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결국 1950년에 들어 남한에서의 좌익활동은 거의 근절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위기는 반공 강경노선의 추구는 국방비와 치안유지비의 과다 지출을 가져왔고, 이는 재정적자를 가져왔으며, 이를 메우기 위한 통화량 증발은 1949년 후반에서 1950년 초에 이르는 동안 급속한 인플레를 가져왔다. 곧 이승만 정권의 반공 강경정책은 1949년 후반 이후 경제위기로 나타났다. 동시에 이승만 정권에게 정치위기도 도래했다. 요컨대 경제적 정치적 위기로 인하여 이승만 정권은 위기 타파의 돌파구를 찾아내야 하는 상황에 몰리고 있었다.
북한의 상황은 1949년 후반기에 군사력을 집중적으로 증가시켰으며, 1950년에 들어서도 지속적으로 병력을 증가했다. 이러한 북한 군사력의 증가는 한인 동북의용군의 대거 귀환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북한은 한국전쟁 직전 두 번에 걸쳐 서로 다른 내용의 통일 제의를 한 바 있다. 6월 7일 조국전선에 의해 발표된 평화통일 호소문은 남북의 전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가 대표자협의회를 구성하고, 총선거를 통하여 통일된 최고 입법기관을 창설하자고 제의했으나, 6월 19일 최고인민회의에 의해 제안된 내용은 북한의 최고인민회의와 남한의 국회를 연합하여 헌법을 채택, 이에 따라 전조선입법기관을 구성하자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직전의 이 두 통일 제의는 10여 일 사이에 그 내용이 바뀌었다는 점, 두 제의 공히 8월 15일까지 통일 일정을 마무리하고자 했다는 점, 전자의 제안에서는 이승만을 비롯한 민족 반역자 9인을 대표자협의회에서 제외하자고 하는 한편 후자의 제안에서는 이들을 체포하는 조건을 제시하는 등 이들 9인에 대한 배제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전쟁 직전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상황을 살펴보면, 남한 외부에서는 자유 진영의 롤백주의자들이 전쟁의 발발을 고대하고 있고 소련은 북한의 무력 강화를 도와주는 가운데, 남한 정권은 내부 위기의 돌파구를 찾고 있었고 북한은 고도의 긴장 속에서 무력 강화와 전투계획 작성에 치중하고 있었던 상황, 이것이 한국전쟁 직전의 전체적 상황이었다.
Ⅲ.
전쟁 발발과 관련된 주장들은 전면적 북침설, 전면적 남침설, 제한적 북침설, 제한적 남침설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전면적 북침설은 북한의 공식주장이고, 전면적 남침설은 남한 정부의 공식적 입장이다. 제한적 북침설은 남측이 전쟁을 유도하기 위해 제한적으로 북을 공격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여기서는 옹진반도 17연대의 해주 공격가능성이 유력시하고 있다. 이 공격은, 중국에서 귀환한 병사들로 군사력을 강화한 채 남한측의 최초 공격을 기다리고 있던 북한의 공격을 야기시켰을 것이라는 것이다. 제한적 남침설의 핵심적 내용은 북한이 군사적으로는 서울 점령만을 목표로 공격했고, 정치적으로는 남한의 2대 국회와 연합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군사적 전개과정은 군사적 상황의 추이에 따라 4국면으로 나눌 수 있다. 1국면은 1950년 6월 25일부터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던 9월 중순까지로, 인민군의 공세 속에서 미군의 개입이 이루어졌던 시기이다. 2국면은 9월 중순 이후로부터 북진한 유엔군이 다시 후퇴하기 시작한 11월말까지의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에는 유엔군의 38선 북진과 중공군의 개입이 이루어졌다. 3국면은 11월말 이후로부터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교착되고 휴전협상이 시작되는 1951년 6월까지의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에는 유엔군의 후퇴가 이루어졌고 이어 전쟁이 제한되면서 38선 부근에서 전선이 교착되었다. 4국면은 6월 하순 이후로부터 한국전쟁이 끝나는 시점인 1953년 7월까지의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에는 휴전협상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면서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여기서는 제 2국면인 유엔군의 북진과 중국군의 개입 그리고 제 4국면인 휴전협상을 둘러싼 갈등과 소모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는 크로마이트작전으로 명명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였고, 동시에 낙동강 방어선의 유엔군도 총반격을 감행하여 28일에는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하였다. 10월 1일에는 국군이, 7일에는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했다. 38선의 북진의 의미는 이제까지의 전쟁이 전전의 원상회복을 위한 '봉쇄를 위한 전쟁'이었다면, 38선 북진은 북한으로의 확전을 의미하는 '롤백을 위한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북진을 둘러싸고 벌어진 미 정책결정자 사이의 논쟁은, 38선을 돌파하고 북한을 점령한 후 유엔 주도하에 한국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주장과, 중소의 개입이 없을 때에만 유엔의 결정으로 북진하되 이들의 개입 여부가 확인될 때까지 결정을 유보하자는 주장 사이의 대립이었다. 전자는 국무성 동북아과 및 군부를 중심으로 주장되었고, 후자는 국무성내 정책기획국이 중심이 되었다. 결국 이러한 논쟁은 전자의 주장이 강하게 반영된 '조건부 북진론'으로 귀결되었다. 구체적으로 이같은 결정은 북한지역에서 중소의 개입을 우려하여 마련된 미군의 작전제한선을 전제로 한 북진 전력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이러한 결정은 유엔의 결정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10월 7일 유엔 총회는 '통일한국안'을 승인함으로써 유엔군의 북진을 사후 합리화시켰다.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의 개입은 10월 2일 소련이 중국군에 대한 공중지원과 전쟁물자를 지원한다는 조건으로 승인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에서 미국과의 직접 대립을 회피하고자 했던 스탈린은 중국군의 참전 직전 갑자기 소련 공군의 파견을 연기시켰다. 결국 중국은 소련의 공군 지원 없이 참전하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중국에 대한 소련의 지원은 1951년에 이르러서야 본격화되었다.
중국은 '抗美援朝保家衛國'의 기치 아래 한국전쟁에 개입하였다. 개입의 가장 커다란 이유는 미국의 공격을 '脣亡齒寒'의 관계에 있는 북한에서 사전에 막아내기 위해서였다. 또한 그것은 중국의 국공내전 과정에서 공산측에 참여하여 싸운 한인들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여하튼 미국의 개입으로 이미 국제전화되었던 한국전쟁은 중국의 개입으로 미국과 중국의 직접적인 전투장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휴전협상에 임하는 유엔측은 군사문제만을 취급하고자 했고 반면 공산측은 외군철수 등의 정치문제까지도 포함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정치 문제는 관련 각국에 대한 건의 문제로 처리되어 전후로 넘겨지게 되었다. 의제는, 1.의제 및 의사일정 채택, 2.군사분계선 설정, 3.휴전감시 방법 및 기구 구성, 4.전쟁포로 처리, 5.관련 각국 정부에 대한 건의 등 5개 항목으로 합의되었다.
휴전협상에 임하는 미국측의 기본입장은 군사적 완전 승리가 불가능한 이제 '영예로운 해결'을 통하여 정치적 심리적 승리는 거두는 것이었다. 남한 이승만 정부는 휴전협상에 시종일관 반대하였고, 휴전이 불가피하게 되었을 때조차 미국으로부터 가능한 한 최대의 지원을 끌어내고자 하였다. 반면 공산측은 '정당한' 조건에서 휴전협상을 이루고자 했고, 따라서 자신에게 강요되는 부당한 조건에 대해서는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므로 전쟁을 끝내고자 시작되었던 휴전교섭은 전쟁을 2년여나 더 지연시켰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 협상과 군사적 압력이 교대로 이어지면서 전쟁의 피해를 증대시켰다.
1951년에는 주로 군사분계선 문제가 논의되었다. 유엔측의 주장은 지상접촉선보다 훨씬 북쪽의 선을 제시했고, 공산측은 38도선을 제시했다. 양측의 교섭은 8월 22일에서 10월 25일 까지 한차례의 중단을 거친 후에 다시 재개되어 지상 접촉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1952년에는 휴전감시 문제와 포로 처리 문제가 주로 논의되었다. 휴전감시 문제는 1952년 5월 2일 휴전감시 출입지역을 쌍방 5개소로 하고, 휴전감시 기구로 체코, 스위스, 스웨덴, 폴란드 등 4개국의 중립국감독위원회를 구성할 것에 합의하였다. 포로문제는 유엔특이 본인의 의사를 확인하여 원하는 포로만 송환하자는 '자유송환원칙(자원송환원칙)' 을 내걸고, 공산측이 제네바협약에 의한 '자동송환원칙(강제송환원칙)'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해결이 지체되고 있다. 유엔측의 주장대로라면 원래 유엔측이 제시한 13만 명의 공산측 포로 중 8만명 만이 송환될 수 있었다. 공산측은 이에 격렬히 반대하였고,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포로 심사와 그 과정에서의 고문, 살해 등에 저항하여 공산 포로들이 수 차례에 걸쳐 폭동을 일으켰다. 결국 포로 처리 문제의 이견으로 인하여 휴전협상은 1952년 10월 8일 다시 중단되었다.
휴전의 분위기는 1953에 들어서 분명해졌고, 이러한 가운데 양측은 포로 문제에 합의하였다. 우선 4월에 병상포로가 교환되었다. 4월 26일에는 중단되었던 휴전회담이 재개되었다. 결국 양측은 귀국희망 포로는 송환하고 귀국반대 포로는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인계하여 그 의사를 확인토록 하고, 여기에서 결정되지 않은 포로들은 민간인으로 석방하도록 합의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휴전에 반대하는 이승만이 6월 반공포로들을 일방적으로 석방했다. 이승만을 제거하고자 하는 '常備'계획까지 세웠던 미국은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이승만에게 휴전협정의 대가로 한미상호방위조약 등 대한공약의 강화를 약속함으로써 그를 달랬다.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3년여에 걸친 한국전쟁은 종료되었다.
Ⅳ.
한국전쟁을 계기로 북한은 본격적으로 독자적인 사회주의체제를 형성해 나갔다. 경제적으로는 생산수단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본격화하여 사회주의혁명을 완성시켰고, 전후복구의 과정에서 자립적 공업화 전략을 추구하였다. 정치적으로는 한국전쟁과 전후복구 과정에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지도체제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자주를 핵심내용으로 하는 주체사상이 형성되었다. 한국전쟁의 영향은 전후 북한의 사회주의체제가 독특한 성격을 지니도록 만들었다. 전후 북한 사회주의에 미친 가장 커다란 특징적 영향은, 전쟁으로 파괴된 생산력을 전쟁으로 고양된 의식을 통하여 일거에 증대시켜 산업화하려 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은 경제적으로 남한이 세계자본주의체제 속에 편입되어 종속적 경제발전을 추구하고,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강력한 반공독재체제를 구축하도록 만들었다. 남한이 정치경제적으로 세계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되어 자신의 자본주의체제를 재생산하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이 관련국들에 미친 영향은, 첫째, 한국전쟁은 미국에 반공반소의 극단적인 매카시즘적 분위기를 야기시켰다. 둘째, 한국전쟁은 병참기지 역할을 한 일본의 경제를 부흥시켰으며 일본의 재무장을 촉진시켜, 나중에 자위대로 발전하게 되는 경찰예비대가 창설되었다. 셋째, 소련은 한국전쟁에 대한 어중간한 태도로 인하여 양진영에서 욕을 먹었고, 북한의 친중국화하도록 만들었다. 넷째, 중국은 한국전쟁에 참여하여 제 3세계에서 위신을 높이는 한편 내부적으로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의 지도력을 높였다. 반면에 대만 통일의 기회를 잃어버리는 한편, 이후 20년 동안이나 미국과 대립함으로써 대만은 한국전쟁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한국전쟁이 남북한 분단구조에 미친 영향은 휴전협정 체결 이후 정치협상을 통한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실패한 데서 상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전후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무산되고 남북은 단지 전투행위만 중단시키고 있는 휴전상태에서 이후 군사적 대립을 계속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세계적인 냉전구조에 미친 영향은 한국전쟁 이후 팍스아메리카나 체제가 확립되었고, 유럽에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강화되었으며 아시아에서는 태평양 안보체제가 강화되었다. 태평양 안보체제는 미일평화조약 및 대평양안보조약, 앤저스(ANZUS) 및 동남아조약기구(SETO)와 중앙조약기구(CENTO) 등의 지역동맹체제, 한미상호방위협정과 미일안보조약 등을 통하여 구축되었다. 한편 한국전쟁 이후 미국은 급속히 핵무기를 증대시켜 냉전대립에서 '대량보복전략'을 채택하였다.
Ⅴ.
한국전쟁의 성격은 첫째 미소를 중심으로 한 체제대립적 성격을 주장하는 시각, 둘째 내부의 갈등을 주장하는 내전적 시각, 셋째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저항하는 한국 민중의 민족해방투쟁적 시각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의 체제대립적 시각은 한국전쟁의 성격을 미소를 대리한 대리전쟁으로 파악한다. 미소의 대립에서 소련의 팽창정책이 한국전쟁의 원인이라는 전통주의적 시각과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이 한국전쟁의 원인이라는 수정주의적 시각이 포함된다. 두 번째 내전적 시각은 한국 내부의 민족적 계급적 갈등이 한국전쟁의 기본적 동인이라고 파악한다. 이러한 시각은 후기수정주의자들이 포함된다. 세 번째 시각은 일제에 대한 민족해방투쟁에 뒤이어 미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예속화정책에 대한 한국민중의 저항으로 한국전쟁의 성격을 파악한다. 예를 들면 북한의 조국해방전쟁론이 대표적이다.
한국전쟁의 배경은 국내적 차원, 동북아시아 차원 및 세계적 차원의 중층적 대립구조를 다음과 같이 지니고 있었다.
·1950. 6. 25 ~ 6. 30 : 한국전쟁 발발 이후 미 지상군의 본격 개입이 있기까지 한국전 쟁은 '내전적 성격'을 보이고 있다.
·1950. 6. 30 ~ 10. 19 : 미국 개입 이후 중국군이 개입하기 이전까지는 '민족해방적' 성 격을 보여주고 있다.
·1950. 10. 29~ 1953. 7. 27 : 중국이 개입한 이후에는 중국과 미국의 '체제 대립적'성격 을 보여 주고 있다.
이상과 같이 전쟁의 확대와 더불어 형태상으로 전쟁의 성격이 변화하고 있다. '내전적 성격→내전적 성격+민족해방적 성격→내전적 성격+민족해방적 성격+체제대립적 성격' 등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직접적인 무력의 사용에 의해서 현실적 구체화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려는 전쟁을 현실전이라 보고, 동원되는 폭력의 종류와 수준이 다양하면서 가시화된 현실적 목표보다 이념상 명분 확보를 목표를 삼는 전쟁 양상을 이념전이라고 정의한다면, 한국 전쟁은 이 두가지 양상을 동시에 머금고 있는 전쟁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전쟁은, 전통적 의미에서의 현실적인 전쟁 목표도 가지고 있었던 반면, 동·서 이념 분쟁의 최전선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명분상의 목표가 중요시되었던 이념전(理念戰)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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