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가득

해방직후

겨울무지개 2006. 12. 9. 00:23

1. 사실 해방이전에는 좌우 양진영이, 지역에 큰 관계 없이 분포하고 있었습니다.

38선 이남에는 미군이, 이북에는 소군이 진주하면서 각각 우파와 좌파가 힘을 얻은

것이지, 해방직후 생겼다는 표현은 좀 부적절합니다..

 그리고, 김구는 임시정부의 핵심요인이었으며 독립운동에 많은 활동을 하였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중국에서 보냈으므로 국내 지지기반은 비교적 약했습니다.

오히려 국내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이중에 일부는 친일에 가담)이 기반이

강했습니다. 이승만이 초기에는 한민당과 힘을 합쳤는데, 그 한민당이 호남에

기반을 둔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 정당이었습니다. 김성수, 송진우 등의 인사가

대표적이죠. 오히려 김구가 확실히 해방정국을 주도한 적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외에도, 이남에서는 여운형 등의 중도좌파 세력도 상당했으며,

박헌영 등의 조선공산당(후 남조선노동당) 세력도 강했습니다.

해방 초기 38선 이남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이승만, 김구, 여운형, 박헌영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북지역에서는 평안도와 함경도가 양상이 좀 달랐습니다. 평안도는 기독교 신도가

많은 지역이었으므로, 민족계의 조만식이 가장 명성과 신망이 높았습니다. 평안도가

배출한 가장 영향력 있는 독립운동가로, 해방 당시에는 이미 고인이 된 안창호도

민족계이지요. 반면 함경도는 공산주의자의 세력이 강했습니다. 해방 직후에도,

가장 영향력이 있던 세력은 조만식 등의 민족계와 국내파 공산주의자(현준혁,

주영하, 오기섭) 등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소련군 소속이었고,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였으므로 명성은 있어도 초기에는 세력기반이 약했습니다. 그러나 조만식의

세력이 약화되고, 항일 빨치산파(김일성 등), 연안파(김두봉 등 연안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하던 세력), 소련파(허가이 등 소련에서 양성된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기존 국내파와 이후 남로당의 월북으로 인해 적어도 1950년대 초까지는,

이북지역의 좌파세력은 혼전양상을 띄게 됩니다. 김일성이 확실히주도권을

잡은 것은 한국전쟁 이후입니다. 물론 그전에, 스탈린이 김일성과 박헌영 중

이북지역의 지도자로 김일성을 택한 것이 힘이 되었습니다.

 

2.미국은 초기에, 표면적으로는 강력하게 좌파를 탄압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미국은 자신의 군정 정책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자도 용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띄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표면적인 것일뿐이었지만요. 그러나 얼마 안돼서

미국은 좌우합작운동을 후원했고, 이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들은 불법화 시킵니다..

그러나 사실상 미국이 원하는 바는 강력한 친미정권이 들어서는 일이었겠죠.

미국이 좌우합작운동을 후원한 이유도, 당시 이남지역에 좌파세력이 생각보다 훨씬 강해서, 정국을 공산주의자가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3.우선 중도좌파는 여운형의 암살 이후 구심세력을 잃었고, 남로당 인사들의 월북으로

인해 좌파의 구심이 이탈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많은 좌익 인사들이 죽거나

숙청당했지요. 이후 수십년간 철저한 반공정책이 지속됨으로서, 좌익세력의 활동범위는

극히 좁아집니다. 국가보안법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지요. 더군다나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나, 북한정권의 정책으로 인해 월남한 사람들에게

사회주의는 죄악시되었습니다. 구심점이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한것도 원인이구요.

조봉암의 진보당마저 해산되고, 조봉암이 사형을 받자 사실상 진보계의 좌파진영도

이후 세력을 규합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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